무라카미 하루키 예루살렘 상 수상연설 전문 본 것, 읽은 것


좀 늦었지만..
전문을 구했기에 번역을 했다. ↓

전문 궁금하셨던 분들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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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come to Jerusalem today as a novelist, which is to say as a professional spinner of lies.


오늘 저는 이 곳 예루살렘에, 소설가로서, 거짓말의 묘수라 할 수 있는 존재로서 와 있습니다. 
  
Of course, novelists are not the only ones who tell lies. Politicians do it, too, as we all know. Diplomats and military men tell their own kinds of lies on occasion, as do used car salesmen, butchers and builders. The lies of novelists differ from others, however, in that no one criticizes the novelist as immoral for telling them. Indeed, the bigger and better his lies and the more ingeniously he creates them, the more he is likely to be praised by the public and the critics. Why should that be?

소설가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정치가도 거짓말을 하며, 외교관도 군인도, 저마다의 상황에 맞춰 그들 고유의 거짓말을 합니다. 자동차 세일즈맨이나 외판원, 건축업자가 거짓말을 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소설가의 거짓말은 아무도 비도덕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거짓말과 구분됩니다. 심지어 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 크면 클 수록, 능숙하교 교묘하면 할 수록, 대중과 비평가의 찬상은 커져만 갑니다. 왜 그럴까요?
      

My answer would be this: Namely, that by telling skillful lies - which is to say, by making up fictions that appear to be true - the novelist can bring a truth out to a new location and shine a new light on it. In most cases, it is virtually impossible to grasp a truth in its original form and depict it accurately. This is why we try to grab its tail by luring the truth from its hiding place, transferring it to a fictional location, and replacing it with a fictional form. In order to accomplish this, however, we first have to clarify where the truth lies within us. This is an important qualification for making up good lies.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소설가는 효과적인 거짓말을 통해 진리를 재현하는 픽션을 만들어내고, 이로서 진실을 숨은 곳에서 이끌어내 재조명하는 작업을 해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원형 그대로 거머쥐어 묘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리를 픽션의 세계에 옮기고, 가공의 모습으로 바꾸어 진실의 끄트머리나마 움켜잡기 위해, 진실을 은신처에서 꾀어내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이루려 할 때에는 가장 먼저 우리 내부의 어느 곳에 진실이 내재하는지를 명확히 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좋은 거짓말을 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건입니다.
        

Today, however, I have no intention of lying. I will try to be as honest as I can. There are a few days in the year when I do not engage in telling lies, and today happens to be one of them.

그러나 오늘에 한해 말씀드리면, 저는 거짓말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솔직하고자 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날은 일 년 중 며칠에 불과하지만, 오늘이 바로 그런 날 중 하루입니다.
    

So let me tell you the truth. A fair number of people advised me not to come here to accept the Jerusalem Prize. Some even warned me they would instigate a boycott of my books if I came.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많은 이들이 저에게 예루살렘 상 수상식에 가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제가 예루살렘에 갈 경우 제 책의 불매 운동을 벌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The reason for this, of course, was the fierce battle that was raging in Gaza. The UN reported that more than a thousand people had lost their lives in the blockaded Gaza City, many of them unarmed citizens - children and old people.

이러한 일들은 물론, 가자에서 벌어진 격전에 연유한 것입니다. UN은 약 천여 명에 이르는 인명이 봉쇄된 가자시에서 희생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비무장 시민, 그 중에서도 어린이와 노약자들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Any number of times after receiving notice of the award, I asked myself whether traveling to Israel at a time like this and accepting a literary prize was the proper thing to do, whether this would create the impression that I supported one side in the conflict, that I endorsed the policies of a nation that chose to unleash its overwhelming military power. This is an impression, of course, that I would not wish to give. I do not approve of any war, and I do not support any nation. Neither, of course, do I wish to see my books subjected to a boycott.

수상에 관한 공지를 받은 이후로 몇 번이고, 이러한 시기에 문학상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에 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갈등을 빚고 있는 양자 중 한 편에 서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게 아닐까, 압도적인 군사력을 남용한 정책을 묵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인상은 제가 의도하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저는 어떠한 종류의 전쟁도 용납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책이 불매운동에 부쳐지는 것은 단호하게 원치 않습니다. 
  
Finally, however, after careful consideration, I made up my mind to come here. One reason for my decision was that all too many people advised me not to do it. Perhaps, like many other novelists, I tend to do the exact opposite of what I am told. If people are telling me - and especially if they are warning me - "don't go there," "don't do that," I tend to want to "go there" and "do that." It's in my nature, you might say, as a novelist. Novelists are a special breed. They cannot genuinely trust anything they have no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고 끝에 저는 이 곳에 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결정의 한 가지 이유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저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소설가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하지 말라고 들으면 꼭 해 보고 싶어지거든요. 만약 사람들이 "거기 가지 말아요", "그건 하지 마요" 라고 제게 충고하거나, 심지어 경고 따위를 한다면, 저는 꼭 "거기 가고" 싶어지고, "그렇게 하고" 싶어집니다. 이는 제 본성이고, 어쩌면 여러분은 이를 소설가적 기질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는 독특한 족속들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것이 아니고서는 쉽사리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And that is why I am here. I chose to come here rather than stay away. I chose to see for myself rather than not to see. I chose to speak to you rather than to say nothing.

그리고 바로 그러한 기질이, 제가 이 곳에 자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멀리서 경계하고 있기보다는 여기까지 올 것을 선택했고, 보지 않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을 선택했으며, 침묵하는 것보다, 여러분께 제 목소리를 전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This is not to say that I am here to deliver a political message. To make judgments about right and wrong is one of the novelist's most important duties, of course. It is left to each writer, however, to decide upon the form in which he or she will convey those judgments to others. I myself prefer to transform them into stories - stories that tend toward the surreal. Which is why I do not intend to stand before you today delivering a direct political message.

그렇다고 해서 이 곳에 제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소설가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타자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 그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작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예로 든다면, 저는 저의 판단을 가상 속 이야기에 옮겨 담기를 선호하며, 그것이 바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삼가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lease do, however, allow me to deliver one very personal message. It is something that I always keep in mind while I am writing fiction. I have never gone so far as to write it on a piece of paper and paste it to the wall: Rather, it is carved into the wall of my mind, and it goes something like this:

그러나 제게, 단 하나, 매우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제가 소설을 쓰면서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인 적은 없지만, 그러나 제 마음에 벽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렇게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Between a high, solid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I will always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만일 높고 단단한 벽과 그에 부딪히는 달걀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달걀의 편에 설 것이다" 
    
Yes,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may be and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with the egg. Someone else will have to decide what is right and what is wrong; perhaps time or history will decide. If there were a novelist who, for whatever reason, wrote works standing with the wall, of what value would such works be?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정당하며 아무리 달걀이 틀렸을지라도, 저는 달걀의 편에 설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다른 이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어쩌면 시간이, 혹은 역사라 불리우는 것이 판단할지도 모르지요.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벽의 편에 서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this metaphor? In some cases, it is all too simple and clear. Bombers and tanks and rockets and white phosphorus shells are that high, solid wall. The eggs are the unarmed civilians who are crushed and burned and shot by them. This is one meaning of the metaphor. 

이 은유가 혼란스러우십니까? 경우에 따라 이는 매우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폭격기, 탱크, 로켓과 백인탄은 높고 강고한 벽이며, 달걀은 그 무기들로 불태워지고 총격을 당한 비무장 시민입니다. 이것이 제 은유의 한 가지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This is not all, though. It carries a deeper meaning. Think of it this way. Each of us is, more or less, an egg. Each of us is a unique, irreplaceable soul enclosed in a fragile shell. This is true of me, and it is true of each of you. And each of us, to a greater or lesser degree, is confronting a high, solid wall. The wall has a name: It is The System. The System is supposed to protect us, but sometimes it takes on a life of its own, and then it begins to kill us and cause us to kill others - coldly, efficiently, systematically.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달걀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들 저마다가 유일하고 대체할 수 없는 영혼을 약한 껍질 안에 숨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 모두가,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각각 높고 강고한 벽과 직면해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스템, 이라고 하는 이름을요. 시스템은 애초에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 자가증식을 통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하고,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를 차갑게, 효과적으로, 조직적으로 죽이도록 유인합니다.  
   

I have only one reason to write novels, and that is to bring the dignity of the individual soul to the surface and shine a light upon it. The purpose of a story is to sound an alarm, to keep a light trained on The System in order to prevent it from tangling our souls in its web and demeaning them. I fully believe it is the novelist's job to keep trying to clarify the uniqueness of each individual soul by writing stories - stories of life and death, stories of love, stories that make people cry and quake with fear and shake with laughter. This is why we go on, day after day, concocting fictions with utter seriousness.

제가 소설을 쓰는 목적은 단 한 가지, 개인의 고유한 영성을 드러내고 그것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영혼을 시스템의 거미줄에 엮이지 않도록 보호하는 경고음이자 보조등이 되어 줍니다. 저는 소설 쓰기를 통해 개인 영혼의 고유함을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소설가가 이루어내야 할 소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 읽는 이로 하여금 울고 공포에 떨게 하며, 때로는 웃고 뒹굴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지요. 바로 그 소명이 작가로 하여금 날마다 깊은 고뇌 속에 소설을 엮어내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 줍니다.  
 
My father died last year at the age of 90. He was a retired teacher and a part-time Buddhist priest. When he was in graduate school, he was drafted into the army and sent to fight in China. As a child born after the war, I used to see him every morning before breakfast offering up long, deeply-felt prayers at the Buddhist altar in our house. One time I asked him why he did this, and he told me he was praying for the people who had died in the war.

제 아버지께서는 작년에 9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퇴직 교사이셨고 불직에 몸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대학원에 재학중이었을 때 군대로 출병되어 중국 전투지에 보내졌습니다. 전후 세대인 저는 어렸을 적, 매일 아침 식사 전마다 아버지께서 길고 긴 경독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 왜 그렇게 독경을 외우시냐고 여쭈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He was praying for all the people who died, he said, both ally and enemy alike. Staring at his back as he knelt at the altar, I seemed to feel the shadow of death hovering around him.

아버지께서는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적군도 아군도 관계 없이. 불상 앞에 정좌한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저는 아버지 주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My father died, and with him he took his memories, memories that I can never know. But the presence of death that lurked about him remains in my own memory. It is one of the few things I carry on from him, and one of the most important.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고, 자신과 함께 기억도 같이 데려가셨습니다. 저로서는 알 길이 없는 아버지의 기억들. 그러나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던 그 죽음의 존재감만은 저 자신의 기억으로서 이 곳에 남아있습니다. 이는 제가 아버지에 관하여 지닌 많지 않은 기억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I have only one thing I hope to convey to you today.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transcending nationality and race and religion, fragile eggs faced with a solid wall called The System. To all appearances, we have no hope of winning. The wall is too high, too strong - and too cold. If we have any hope of victory at all, it will have to come from our believing in the utter uniqueness and irreplaceability of our own and others' souls and from the warmth we gain by joining souls together.


제가 오늘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씀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인간이며, 국가 인종, 종교 등을 초월한 개별된 인격이며, 시스템이라 불리우는 굳은 벽을 마주한 깨지기 쉬운 달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아서도 우리에게 승산이란 없습니다. 벽은 너무나 높고 강고하고 차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단 한 가지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고유하고도 대체 불가능한 저마다의 영혼을 서로 공명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온기, 그 따뜻함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Take a moment to think about this. Each of us possesses a tangible, living soul. The System has no such thing. We must not allow The System to exploit us. We must not allow The System to take on a life of its own. The System did not make us: We made The System.

부디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명백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에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착취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며, 시스템이 멋대로 자가증식을 계속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That is all I have to say to you.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I am grateful to have been awarded the Jerusalem Prize. I am grateful that my books are being read by people in many parts of the world. And I am glad to have had the opportunity to speak to you here today.

예루살렘 상을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세계 각처에 제 책을 읽어주신 분들이 계신다는 것에 깊은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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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서.. 내리기 힘들다. OTL
이것도 gutukito 님이 구해주셨다. ㅠ.ㅠ  감사합니다.

뭐 대체로 요약문이 잘 요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겠고 -_-
여전히 개인주의 만만세인 내용이다..

개인주의, 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가 되니
각자 깨어있는 정신을 가지고 성실하게 자기 일도 돌보고 남의 일도 살피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사회에도 좋은 공기가 통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안이한가. -ㅅ-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데.. 생각해 보는 게 나쁜 일은 아니겠지.
가끔 움직여도 보면 더욱 좋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덧글

  • 2009/02/25 02: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英君 2009/02/25 17:33 #

    그러게요.. 그래도 뭐.. 옳다고 느낀 바를 전하는 데까지가 저 사람의 몫이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죠.
    수상을 결정할 정도라면 이스라엘에도 하루키 독자가 꽤 있을 법한데,
    그들 중에 공감하는 사람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역시 모르겠네요. ㅠ.ㅠ
  • dameh 2009/05/06 12:28 # 삭제 답글

    오오.. 잘봤습니다. 검색을 못했으면 큰일날뻔 했습니다(@.@)
  • 英君 2009/05/07 00:27 #

    유용하셨는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F.Kafka 2009/05/21 22:29 # 삭제 답글

    우연히 서핑중 발견해서 읽게되었습니다.
    학창시절 좋아하던 작가였죠. 혹시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하루키 수필집을 권해드립니다. 정말 재밌거든요. ^^;
    연설문 전문은 제 블로그로 퍼가겠습니다. 문제가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 英君 2009/05/22 09:56 #

    저 같은 경우에는 수필집부터 들어갔답니다.. 중학교 때 조용히 학원을 땡땡이 치고-_- 시간을 때우려고 책방에 들어가서, 세라복을 입은 연필 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수필집이 신경 쓰여서 뽑아 들었던 게 처음이었던 거 같아요. 소설과는 또다른 매력이죠. (-: 소설 특히 장편에서는 거의 늘 피와 죽음의 냄새가 나서..
    출처 밝혀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어줍잖은 번역이지만 이해해 주시고.. m(_ _)m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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